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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병리과 레지던트(진단검사의학과 전공의) 입국을 앞두고 있었던 1992년 2월경이 생각난다. 2월은 말턴(과정을 마칠 즈음의 인턴) 중에서도 마지막 달이므로 인턴(수련의) 업무 자체로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나, 때 이른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말초혈액도말 슬라이드 판독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전공의 1년차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말초혈액도말 슬라이드 판독이었는데, 내가 직접 판독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며 책임을 져야 된다는 사실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약간의 두려움 조차 느꼈다.
전공의 1년차 동안에는 판독하는 거의 모든 슬라이드 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장의 보고서는 깊은 고민과 굳은 결심의 결과물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장의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몇 시간을 고민하기도 했었다. 나 자신의 부족한 실력과 경험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지만, 판독에 도움이 되는 환자 정보와 문헌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이었다. 의무기록을 실시간으로 조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작은 정보를 얻기 위해 늦은 밤중에도 병동으로 전화를 하여야 했었다. 문헌정보는 판독실에 비치된 몇 권의 교과서가 전부였다.
이후 약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고민되는 증례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비하면 어려움이 크게 줄어 들었다. 지난 세월 동안 축적된 지식과 경험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눈부신 기술 발전의 덕분이 큰 것 같다.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으로 환자 정보를 쉽게 조회할 수 있게 되었으며, 휴대전화를 통해 주치의와 항시 연락이 가능해졌다. 인터넷을 통해 거의 무한한 정보를 제한 없이 조회할 수도 있게 되었다. 병원전산망을 통해 환자 정보를 조회하고 인터넷으로 논문 자료를 조회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커지고 있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는 시간은 오히려 점차 줄어 들고 있다. 의사로서의, 특히 진단혈액학 의사로서의 업무 모습이 크게 바뀌고 있다.
‘유엔미래보고서 2040’ 이란 책에 보면 2030년에 10가지가 사라진다고 한다. EU, 공교육과 교실·교사, 직장·팀워크·기업이사회, 3천 개의 언어·문화, 의사·병원진료·수술, 종이, 익명성과 기다림, TV저녁뉴스·컴퓨터·도로표지판, 절도와 배심원, 가게·유통·마케팅 등 현재의 판매형태가 그것이다. 보건의료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 의사·병원진료·수술이 2030년에 없어진다는 예측에 당연히 관심이 간다. 현재까지를 의사의 ‘모습’이 인터넷 등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는 의사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향후 우리가 맞이할 변화는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지는 변화라고 한다. 2030년은 내가 정년을 맞는 때이니 나는 다행히(?) 의사라는 직종으로 직업을 마칠 수 있게 되겠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차다.
사람들은 인공지능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동일한 종목에서 경쟁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세돌도 ‘바둑 종목’에서는 알파고를 이길 수 없었다. 진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종목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진단혈액학에서 그것은 무엇일까? 각자 고민해야 할 몫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은 우리 각자이지 미래학자가 아니다. 미래학자는 어차피 인류가 존재하는 한 생존할 것이고 오히려 요즘 같은 불확실한 시대에는 더욱 번창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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